군대 갔다가 국가유공자 된 썰, 그 후의 삶

국가유공자가 된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과거에 작성했던 글을 옮기는데 당시에 글을 읽으면서 그때의 감정이 살짝 되살아났다. 재판 중에 불안하면서도 분노에 빠져 행정 소송을 준비하고 이를 블로그에 쓰던 그때의 감정 말이다.

그동안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글을 써왔지만, 마지막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국가유공자가 되었을 때의 소감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글이다.

1라운드: 군대는 나의 적이었다.

나는 군 생활을 하던 중 하사가 던진 삽에 발등이 찍혀 엄지발가락을 들어 올리는 힘줄이 파열되었다. 바로 민간 병원으로 이송되어 봉합 수술을 받았지만, 그 후에도 발목을 들어 올려지지 않아 계속 군 병원에서 MRI 검사를 요청했으나 대기 기간만 한 달이 넘었다.

국가유공자 등록 후기
MRI검사 결과

군부대에서는 나에 대해 꾀병이 아니냐는 불만이 있었고, 그 때문에 나는 발목을 움직이기 힘든 와중에도 빨래를 담당해야만 했다. 이게 군대다. 발목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나는 고집을 부려 MRI 검사를 받기 위해 한 달 이상을 기다렸다. MRI 검사 결과 바로 힘줄을 이었으면 장애인이 안되었는데 한 달이나 군부대에 검사도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있었으니 이제 제대로 걸을지도 알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울었다.

국가유공자 등록 후기
무너진 하늘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고 장애인이 된다는 생각에 나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이제 일도 제대로 못하고 결혼도 못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신세 집에만 틀어박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한 삶이었다.

절망스러운 상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말 하늘이 어둡게 보였다. 길이 없고 막막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실제로 체감했던 날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봤는데 아버지가 나를 보는 표정 또한 절망스러웠다. 그때 깨달았다. 이 문제는 아버지가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힘들게 한 군부대에게 화가 났고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국가유공자 후기
군부대는 나의 적이다.

군부대에서는 사건을 덮고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나는 그들의 적이었고, 그들은 나의 적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저 내가 이 악물고 싸워야 한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화와 복수심을 동력으로 계급도 무시하고 강제로 공무상병 인증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약 1년 동안의 재활 치료가 이어졌다. 다행히 처음 진단과 달리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재활 치료를 하는 동안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사실 병원에서 그 외에 딱히 할 일이 없다.

2라운드: 보훈청도 나의 적이었다.

의병 제대를 하고 관할 보훈청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했지만, 여기서 보훈청의 태도를 보고 또 깨달았다. 그들의 적이 나라는 것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대우를 해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유공자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고 이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가유공자를 쉽게 해주지 않는 어려운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국가유공자 후기
국가유공자 행정소송

행정부에서는 국가유공자를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다. 어쨌거나 보훈청에서는 요건 심의와 신체검사를 통해 높을 확률로 탈락 시킨다. 굳이 굳이 행정 소송을 통해 재판에서 이겨야 국가유공자로 등록 시켜주는 이유는 이 과정에서 힘들어서 포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보훈청에서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행정 소송에는 변호사 비용 뿐만 아니라 패소 할 경우 상대방의 재판 비용도 물어줘야 한다. 이러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정 소송을 진행한 이유는 내가 국가유공자가 되리란 확신이 있기 보단 단순한 확률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행정 소송에서 패소하면 약 5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한다. 물론 큰돈이지만 이는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작은 돈이다. 반면 행정 소송에서 승소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국가유공자 연금을 받는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굉장한 이득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 나는 화가 나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싸워서 쟁취해 내야 한다는 것이 내 인생관이었다. 다만 돈을 절약하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나홀로 소송을 진행했다.

국가유공자 후기
싸워서 이기자!

당시에는 분노가 너무 강해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 상대가 어떻게 반박하는지 난 어떻게 대답할지 하루 종일 고민할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다음 변론 기일이 기다려졌다. 심지어 삽을 던진 하사와 미사 소송을 하던 도중 국가 담당 변호사가 로스쿨을 제안할 정도였다. 분석하고 비판하고 글로 표현하는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법원 판결을 받았을 때 인생 처음으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동안의 노력이 보답 받았을 때의 짜릿함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국가유공자 등록, 그후의 삶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었을 당시에는 인생이 크게 바뀔 줄 알았다. 더 이상 소송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재판에서 이겨 받은 돈으로 사업을 해서 삶이 잘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사업은 소송이나 싸움과 달리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 후 사업에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았다. 지금은 개인 회생을 하면서 성실히 빚을 상환하고 있다. 2년 뒤에는 모두 상환하는 데 개인 회생 노하우에 대해서도 글을 써볼까 생각 중이다.

국가유공자 등록증
국가유공자 등록증

물론 매월 죽을 때까지 보훈 급여가 나오기 때문에 더 안정적인 생활은 가능하지만(난 그 돈을 빚 상환에 다 쓰고 있지만 말이다), 난 7급이라 월 60만원 정도다. 작은 돈은 아니지만 일을 안하고 살 정도의 돈은 아니다. 국가유공자가 되어 삶이 달라졌는가? 나를 보고 부럽다고 하는 사람은 있지만, 잘은 모르겠다.

다만 내가 행정 소송을 하며 깨달은 것은 인생은 끝없는 투쟁이란 것이다. 월 60만 원씩 연금을 받는다고 투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끝없는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끝없는 투쟁에서 승리하길

가끔 이메일이나 댓글로 도와달라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모두 글로 남겼다. 디테일한 부분은 사건이 달라 내가 도와줄 수 없다. 난 변호사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내 일은 내가 제일 잘 알고 내가 제일 절박하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남들이 대신해 주지 않는다.

다만 나의 노하우와 정보는 알려줄 수 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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